[이순원의 마음풍경]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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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 입력 2021.03.07 00:00
    • 수정 2021.03.09 06:47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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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문화개방 이야기가 처음 나오던 때니까 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양국간에 문화교류 일환으로 일본 영화가 수입되어 우리나라 극장에서 처음 상영될 때였다. 일본 국내문화에 한류가 대세인 지금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당시엔 양국의 영화 개방 하나만으로도 문화교류를 넘어 이것이 다시 일본의 문화침탈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까지 나왔다. 

    그때 인상적으로 보았던 두 영화가 있다. 하나는 일본판 고려장 이야기를 그린 ‘나라야마부시코’이고 또 하나는 ‘가게무샤’로 우리말로 하면 ‘그림자 무사(影武者)’이다. 1980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책으로는 좀 더 일찍 읽었다. 한때 우리나라에 ‘야망’이니 ‘대야망’이니 하는 제목으로 20여권 30여권으로 번역되어 나온 일본 대하소설이었다. 나중에 보니 이 책도 원래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가게무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한 부분에 나와 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 군웅할거 시절 다케다 신겐이라는 출중한 장수가 있었다. 평소에도 그는 자신과 얼굴이 비슷한 무사를 내세워 적을 교란하고, 적의 암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그런 신겐이 어느 날 저격을 당해 치명상을 입고 유언으로 3년 동안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라고 말한다.

    그러자면 살아있을 때뿐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그림자 무사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신겐과 얼굴이 똑같은 어느 좀도둑을 내세우는데, 신겐의 첩실들조차 그가 가짜임을 눈치 채지 못한다. 반대쪽에서는 저격당한 신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고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걸지만 가게무샤가 실제 신겐처럼 나서서 이를 물리친다.

    이런 과정에 과거 좀도둑이었던 그림자 무사는 예전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신겐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자기가 죽은 신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겐 처음부터 신겐은 죽지 않았고 자기가 신겐인 것이다. 그 속에 없어진 것은 과거의 자기 자신 좀도둑이다.

    그런데 역사 속의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할 때 배우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자신과 배역의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봐도 그렇다. 이방원의 편을 들어 왕자의 난에 앞장섰던 이숙번 배역과 그때 세자 방석의 편을 들었던 정도전 배역의 배우가 드라마에서만이 아니라 드라마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배우가 아니라 그때 그 인물의 입장에서 역사를 말한다.

    그보다 조금 뒷시대의 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그린 드라마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배우와 그를 돕는 쪽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도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자리에 나와서 이야기를 할 때 그 배역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여 그때의 역사까지도 그쪽 편에 서서 말한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역의 배우와 일찍이 세조 편에 섰던 신숙주 역의 배우 역시 그들 나름으로 배역 입장을 넘어 역사해석에서도 자기가 맡은 배역 쪽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더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배우는 정말 저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과 생각까지도 동일해야 그 배역을 살아있는 모습처럼 그려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배우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배우니까 자신이 맡은 역 인물의 그림자가 될 수 있고, 생각까지도 똑같게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도 거기에 흠뻑 빠져 몰입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저 인물들이 시간이 좀 더 지난 다음 다른 드라마에서 상대편 배역을 맡게 되면 어떨까? 수양대군의 역을 맡은 배우가 김종서 역할을 맡게 되고, 성삼문 역을 맡은 배우가 나중에 수양대군 역할을 맡으면 그때에는 배우로서 극중 인물과 어떤 교감을 하게 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때로는 의견이 부딪치기도 하고 갈리기도 하는 상황에서 똑같은 일을 두고 상대편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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