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그립고 즐거웠던 노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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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그립고 즐거웠던 노달기

    • 입력 2021.02.21 00:00
    • 수정 2021.02.22 00:03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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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올해는 설이 늦었지만 보통은 입춘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이 든다. 그리고 설날에서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이 기간이 농촌에서는 가장 한가하다. 지금은 농번기 농한기라는 말이 따로 없지만 예전에는 이 기간이 겨울 농한기 중에서도 가장 일이 없고 한유했다. 일부러 일을 찾자고 해도 등에 지게를 댈 일이 거의 없는 기간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넉가래를 들고 마당의 눈과 동네 길가의 눈을 치우는 것 말고는 도시 할 일이 없었다.

    어른들만 노는 것이 아니라 시골의 아이들도 이 기간 풀어질 대로 풀어진다. 아침 먹으면 점심 먹을 때까지 줄기차게 얼음판에 가서 놀거나 경사진 눈밭에 가서 썰매를 탄다. 아침과 점심 사이, 그리고 점심과 저녁 사이 외양간에 매어져 있는 소에게 입이 심심하지 말라고 짚 몇 단 구유에 풀어주는 것 말고는, 그리고 해 넘어가기 전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에 군불을 때는 것 말고는 도대체 할 일이 없다.

    어른들도 놀자판이고 아이들도 놀자판이다. 다른 동네에서는 이 시기를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이때를 ‘노달기’라고 불렀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노달기’라는 어감 속엔 왠지 ‘코가 노랗게 노는 시기’라는 의미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음력 설에서부터 대보름까지의 보름 기간을 특히 그렇게 불렀다. 겨울이라 크게 할 일도 없고 명절 기분 속에 어른도 아이도 마음이 가장 해이해질 때다.

    그러나 바로 이때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네에 낯모르는 외지 사내 몇이 어정거리며 들어와 바람을 잡다가 어느 집 사랑방에 마을의 큰 어른들 모르게 노름판이 서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마음이 풀어질 대로 풀어지는 노달기 때의 일이다. 한 해 동안 뼈가 부서지도록 농사를 지어 그걸 고스란히 투전판에 다 까올리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래서 예부터 ‘노달기 넘기가 보릿고개 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마을의 나이든 어른들이 노달기 때 외지 건달이 들어와 동네 젊은 사람들을 투전판으로 불러내지 않는지 경계하며 단속했다.

    내가 자란 마을에서도 설과 보름 사이, 이 기간 동안엔 아이들의 밤마실까지 일정 부분 허용해 주었다. 어린 것들이 모여 너무 밤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놀거나 또 남의 집 물건을 뒤지는 작폐만 하지 않으면 동네 큰집 사랑방 바로 뒷방에 그 집 아이와 함께 동네 아이들 대여섯이 모여 노는 걸 허락해줬다. 재잘재잘 떠들며 윷놀이를 하면 때로 큰 인심을 쓰듯 이 어린 손님들에게 엿과 과줄, 강정, 곶감, 약과, 식혜 같은 내어주기도 했다. 남자도 여자도 같이 놀았다. 요즘 도시의 어른들이 보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고 또 그렇게 자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정월보름 바로 다음날이면 그동안 노달기의 여유를 부리던 마을 어른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헛간에 넣어두었던 지게를 꺼내 겨우내 외양간에서 나온 거름을 논밭으로 져내는 일이었다. 그동안 한유하던 농한기가 끝나고 이제 또 한해의 새 농사가 시작되었음을 보름 다음날 거름 짐을 져내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선언하며 예전 근면했던 날들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들도 어제까지는 윷놀이를 하고 연을 날렸지만 보름 지난 다음엔 바로 윷을 치워버린다. 어제까지는 윷놀이를 하다 형제가 다퉈도 큰 야단을 치지 않았지만 보름 지난 다음에까지 윷놀이를 하면 아직도 윷놀이를 하냐고 야단을 쳤다. 연도 보름 지난 다음에 날리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잘 날린다, 이렇게 날려라, 저렇게 날려라, 하고 코치를 하던 어른들이 대체 어느 집 아이가 저렇게 때도 모르고 연을 날리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연줄도 보름 전날에 미리 끊거나 보름날에 끊었다.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밤마실을 끊었다. 보름 명절 바로 다음날 거름지게를 지는 이유도 이제 놀 때와 일할 때를 확실하게 구분하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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