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어머니와 아들의 슬픈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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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어머니와 아들의 슬픈 동행

    • 입력 2021.02.08 00:00
    • 수정 2021.02.09 07:51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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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이번엔 소설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을 떠올린 것은 며칠 전 내렸던 눈 때문입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자니 읽으면서 살짝 눈물을 흘렸던 이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감성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중년 남성의 눈물을 자아냈던 그 소설은 이청준의 ‘눈길’(열림원)입니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7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는데 어머니를 그린 문학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짠한 이야기들이 담겼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청준 작가의 작품엔 손이 선뜻 가지 않았습니다. 소설이란 재미 혹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의 힘이 으뜸가는 미덕이라 여기는 단순한 독자였던 탓이 큽니다. 저에게 이청준 작가의 작품은 문체는 명징하지만 ‘이야기’보다는 ‘메시지’에 무게를 둔, 지식인 소설이란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금을 건드리는 서정적 작품들이 있는 줄 뒤늦게 알았습니다.

    술버릇이 사납던 형이 전답과 선산에 이어 마침내 아버지 때부터 살던 집까지 팔아버렸답니다. K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주인공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예전 살던 집은 텅 비었고 식구들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습니다. 황망해서 친척집을 다니며 수소문하던 그를, 나이 든 어머니가 찾아와 고향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네가 누군데 내 집 앞 골목을 이렇게 서성대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면서요.

    그날 밤 어머니는 옛날과 똑같이 저녁밥을 지어내고 하룻밤을 거기서 함께 지냅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하루라도 아들이 옛날 같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맘 편히 눈붙이고 가게 해주고 싶어서 새 집주인에게 양해를 얻어 혼자서 기다렸던 겁니다. 몇몇 날을 텅 빈 집을 드나들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면서요.

    모자는 이미 남의 집이 된 사실을 서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새벽 두 모자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눈 덮인 산길을 걸어 가까운 버스 터미널로 향합니다. 공부를 위해 도회지로 다시 돌아가는 아들은 어머니를 어둠 속에 혼자 세워둔 채 혼자 훌쩍 버스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 아들을 아무 일 없는 듯이 보내고 어머니는 어두운 새벽 눈길을 되짚어 돌아갑니다. 막상 돌아가도 몸 뉘일 곳조차 없는데도.

    눈발이 그친 신작로에는 모자의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어머니는 산비둘기만 푸르르 날아올라도 아들이 새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 설렜답니다. 눈을 이고 있는 나무를 보아도 금세 아들이 뛰쳐나올 듯 싶었답니다. 절로 눈앞이 흐려지며 오목오목 눈길에 파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립니다. 그렇게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도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라며 아들의 앞길을 빌었다죠.
     
    이야기는 소설답게, 성인이 된 주인공이 여전히 방 한 칸 집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왔다가 뒤늦게 알게 되는 구조입니다. 모자가 옛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던 그 날, 그래도 옛날 집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어머니가 남겨 두었던 반닫이를 실마리로 주인공의 아내가 시어머니를 졸라 듣는 회고 형식이죠. 

    평소 ‘빚진 게 없다’고 어머니에게 냉담했던 주인공은 눈길을 걸어 돌아오던 어머니의 심사를 뒤늦게 알고는 “어머니가 걸었던 그 하얗던 눈길, 그 막막하고 서럽던 흰 길을 어찌 세상의 자식들이 다 알았다 할 수 있으랴. 자식은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할 그 어머니의 길… 애초에 갚으려야 갚을 길이 없는 그 길, 어머니의 길, 눈길로, 우리는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습니다.

    영화나 소설평에서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글을 스포일러라 해서 금기시하는 걸 알긴 합니다. 그럼에도 줄거리를 거의 이야기한 것은 글솜씨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이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듯해지는 감동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책은 나온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니 서점에서 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도서관에서라도 빌려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소설의 먹먹한 분위기를 전하는 데 그만인 수채화가 곁들여진 책은 정말 읽는 이들의 마음을 정화해줄 테니까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재미도 좋고 뜻깊은 메시지를 담은 지혜도 좋지만 때로는 마음을 착하게 하는 소설도 우리는 읽어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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