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설날을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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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의 마음풍경] 설날을 기다리는 마음

    • 입력 2021.02.07 00:00
    • 수정 2021.02.08 08:29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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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가 MS투데이 새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이순원의 마음풍경’이라는 코너로 삶 속의 잔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가 돼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리문학상, 황순원작가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유정문학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올해는 설날이 2월12일이다. 어릴 때 신정은 늘 1월1일 그 자리인데 음력으로 쇠는 설날은 매년 왔다갔다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이 새해 달력을 받아오면 우리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설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었다. 1월20일쯤 설날이 들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올해처럼 2월 한중간에 들면 그걸 기다리는 마음이 여간 지루하지 않다. 우리는 잔칫날을 기다리듯 설날을 기다리는데 어른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갖가지 음식과 설빔을 장만하면서도 거기에 들어갈 돈 때문에 한 걱정이다.

    우리에게 설날은 그날 하루만의 명절이 아니다. 어른들이 명절을 준비하는 열흘 전부터 이미 우리에게는 축제의 시간이다. 설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장만하는 특별 음식이 엿과 두부였다. 긴 겨울밤 식구들 모두 잠든 새벽에 어머니 혼자 일어나 가마솥에 엿을 곤다. 엿은 한 번 고면 겨우내 먹었고 두부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얼음처럼 차가운 물동이 속에 담가두고 보름 넘게 보관해 먹었다.

    있는 집들은 쌀엿을 고기도 하고 특별히 수수엿을 고기도 하지만 보통은 강원도에 많이 나는 옥수수엿을 곤다. 설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음식을 장만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바로 가마였다. 평소엔 쇠죽을 끓이던 가마에 두붓물을 끓이고 엿을 고고 떡쌀을 찌고 증편을 만든다. 첫새벽에 소여물 한번 끓여준 다음 오후 늦게까지 가마를 이용해 다른 음식을 만든다. 떡을 찌는 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지만 엿을 고는 일은 거의 종일 걸린다.

    어머니가 새벽부터 불을 때기 시작한 가마솥의 엿물이 오후가 되면 서서히 졸아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누가 부르지 않아도 저마다 밖에서 놀던 어린 형제들이 하나둘 부엌으로 모여든다. 얼음판에 나가 놀던 형도 들어오고 뒷동산에 올라가 연을 날리던 동생도 엿물이 줄어드는 시간만큼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안다. 동네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동생도 어느새 부엌에 와 있다. 

    다들 가마 아궁이 앞에 제비새끼처럼 나란히 쪼그리고 앉는다. 추위에 얼었던 볼이 아궁이 속 장작불에 발개진 채 목을 늘여 가마 속에 졸아드는 엿물을 바라본다. 어머니가 젓는 주걱에 조청이 길게 붙기 시작하면 모두 입맛을 다시며 매직쇼를 바라보듯 그것을 바라본다. 마당가엔 허리높이까지 눈이 쌓이고, 엿을 고는 날의 안방 구들은 어른들도 깔개 없이 그냥 앉아 있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 우리가 일 년에 며칠 단 것을 양껏 주전부리하는 때이기도 했다.

    엿을 고는 날만큼이나 신나는 날이 떡을 빚는 날이다. 설부터 보름까지 세배객들이 많이 드나들어 떡도 아주 푸짐하게 한다. 인절미는 커다란 안반 양쪽에서 누가 떡을 쳐주어야 해서 마당에서 만들고 절편과 증편 같은 떡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부엌에서 만든다. 떡을 만들 때도 우리는 멀리 있다가도 마당에서 아버지와 큰형이 떡을 치는 소리를 듣고 다들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요령 있게 치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형은 그러질 못해 형의 떡메는 늘 떡뭉치에 고무처럼 달라붙어 흐름을 끊는다. 할머니는 그래도 떡메를 휘두르는 형을 장하다고 칭찬한다.

    부엌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절편을 만드는 풍경도 그대로 떠오른다. 지금은 절편도 기계로 뽑아 떡살 무늬가 없지만 그 시절 절편들은 떡 위에 판화를 찍어내듯 떡살로 갖가지 문양을 찍어냈다. 어떤 때는 우리가 해보겠다고 떼를 쓰고 나서기도 한다. 이렇게 떡살로 무늬를 찍는 떡들은 이제 특별히 주문하지 않으면 어딜 가도 구경할 수가 없다. 

    명절이 지난 다음 형제들이 화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떡을 구워먹던 추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화로 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바짝 얼은 떡을 올려놓고 그것이 따뜻하게 풀어지길 기다리며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얘기 듣던 그 추억과 풍경은 이제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올해도 설날은 어김없이 세월을 안고 다가오는데 그런 추억 때문에 지금도 나는 설맞이를 좀 푸짐하게 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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