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장작난로와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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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장작난로와 도시락

    • 입력 2020.12.13 00:00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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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12월이 시작되고 추위가 밀려오자 마침내 교실 한가운데에 둥근 무쇠난로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들은 함성으로 난로를 반겼다. 난로가 들어서면 자리 배치도 다시 했다. 난로 앞과 옆 그중에서도 바로 뒤가 가장 명당자리였다. 등이나 옆구리보다 앞이 따스하고 또 난로와 연통이 가려주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잠깐씩 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으면 교실 분위기는 당연히 훈훈해졌다. 유리창 밖에는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우리들이 앉아 공부를 하는 교실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졸업할 때까지 난로의 땔감이 장작이었다. 어느 해 하루 오후는 전교생이 학교 근처의 야산으로 가서 솔방울을 줍기도 했다. 솔방울은 불쏘시개로 사용하기에 딱 맞았다. 어린 우리들은 비료포대를 들고 산비알(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솔방울을 채취했는데 공부보다 당연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또 어느 해에는 학교에 갈 때 장작 몇 개씩 가져가야 했다. 등에는 책가방을 메고 손에는 새끼줄로 묶은 장작을 들고 등교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교실의 난로에 누가 불을 피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아저씨(소사라고 불렀던)가 모든 교실의 난로를 피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주번이나 난로당번이 피웠을 것이다. 아니면 담임선생님일 수도 있고 하여튼 1교시는 모든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느라 수선스러웠다. 창문 밖 연통들에선 연기가 폭폭 빠져나왔고 가끔은 교실에도 매운 연기가 가득 차서 환기를 하느라 바빴다. 불이 붙고 열기가 퍼질 때까지 우리들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곱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공책에 필기를 했다.

    샛바람이 부는 날이면 연통으로 빠져나가던 연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는데 그때마다 난로는 기침을 하듯 쿨럭쿨럭 교실 안으로 연기를 토해냈다. 그러면 수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은근히 기다리던 친구들도 많았다. 그 친구들은 장작난로에서 연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과장되게 기침을 하느라 바빴다. 

    교실의 난로는 많은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가운데 백미는 도시락을 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로가 없을 때는 점심시간에 차가운 밥과 반찬을 먹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4교시가 시작되기 무섭게 아이들은 책가방이나 서랍에서 도시락을 꺼내 난로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일본어인 벤또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각양각색으로 생긴 서른 여개의 도시락들이 세 칸으로 나뉘어 난로 위에 쌓였는데 지금의 아파트단지와 모양이 비슷했다. 4교시 수업 사이사이 도시락당번은 목장갑을 끼고 난로 위의 도시락 위치를 바꿨다. 아래의 도시락은 위로 올라가고 위의 도시락은 아래로 내려오는 순으로. 그래야만 모든 도시락이 골고루 적당하게 데워졌다. 가장 좋은 위치는 아래에서 세 번째쯤이었는데 아이들은 도시락당번이 난로 옆으로 나갈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도시락이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 살피느라 수업은 아예 딴전이었다. 

    내가 도시락당번이 됐던 겨울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어느 도시락당번보다 공정하게 도시락을 난로 위에 배치할 자신이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 신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 까닭은 바로 학교 근처에서 가겟집을 하는 같은 반 친구 녀석 때문이었다. 녀석은 가겟집 아들답게 학교에 올 때마다 늘 가방에 맛있는 과자를 넣어가지고 왔고 그 과자로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들의 환심을 샀다. 내가 가진 용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과자에 넘어가는 여자아이들도 야속했지만 단지 가겟집 아들이라는 이유로 마음껏 과자를 가지고 다니는 녀석은 더더욱 미웠다.

    나는 결국 도시락당번의 신념을 깨버리고 도시락에다 소심한 복수를 시도했다. 난로 위 도시락의 층을 바꿀 때마다 녀석의 도시락은 가장 아래 아니면 가장 위에다 놓았다. 밥이 타서 눌러 붙거나 아니면 식은 밥 그대로가 되도록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녀석이 까맣게 탄 도시락을 들고 와 항의를 했지만 나는 고의가 아니라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물론 몰래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아이의 도시락은 언제나 가장 좋은 층에다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의 중간쯤 되면 교실은 고소한 들기름 냄새로 진동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의 도시락은 밥과 김치 고추장이 전부였는데 엄마들이 거기에 들기름을 섞어줬기 때문이다. 난로 위에서 도시락은 김치볶음밥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들기름 냄새만 맡아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다. 유리창 밖에는 마침내 대관령의 겨울을 알리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나고 선생님께 인사를 하기 무섭게 난로로 달려가 자기 도시락을 찾았다. 도시락들이 모두 사라진 난로 위에는 볶은 보리알이 담긴 커다란 주전자가 다시 자리를 잡은 채 김을 솔솔 피웠다.

    여자아이들과 달리 남자아이들의 도시락의 비우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운동장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으니 빨리 점심을 먹고 나가 눈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옆 반에서 도전장이 들어온 것이었다. 쌀 한 톨, 반찬 한 점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운 도시락을 가방 속에 넣어놓고선 부리나케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운동장엔 벌써 발목을 덮을 정도로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방금 밥을 먹었기에 아이들의 기운은 넘칠 대로 넘쳐났다.

    양쪽 진영이 갖춰지자마자 함성과 함께 눈싸움이 시작됐다.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상대편을 운동장 끝까지 밀고가면 이기는 것이었다. 점심을 모두 먹은 여자아이들은 교실의 창문을 통해 구경하거나 운동장까지 나와 직접 눈을 뭉쳐서 건네주기도 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한동안 지속됐지만 승리는 우리 반의 몫이었다. 바로 눈싸움 전문가인 나의 전략 덕분이었다. 눈싸움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미리 조직한 우리 반의 별동대는 은밀하게 교사 뒤로 돌아가 상대의 뒤편을 기습하는 방법이었는데 거의 손자병법이나 다름없었다. 

    눈싸움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오면 모두들 난로 옆으로 모여 젖은 옷과 양말 운동화를 말렸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여자아이들이 소리쳤지만 남자아이들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난로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5교시가 시작되고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이 제일 먼저 지시하는 일은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그치지 않는 함박눈이 운동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5교시였다.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와 싸우는 우리들의 5교시이기도 했다.

    도시락당번을 맡았던 그 겨울 내내 나는 가겟집 아들 녀석과 계속해서 도시락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같았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녀석이 그 여자아이에게 가게에서 가져온 과자로 끊임없이 환심을 베풀었기에 그럴 여건이 안 되는 나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관령 산골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과자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문제는 그 과자를 사먹을 용돈이 풍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아이들은 녀석이 과자를 꺼내면 그 옆으로 다가가 조금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섰다. 나는 한없이 고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난로 위 녀석의 도시락을 끝까지 사지로 모는 게 전부였다. 태우거나 차가운 얼음으로 만들거나.

    하지만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녀석의 도시락에 소심한 테러를 가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녀석은 기존의 도시락 대신 전교에서 처음으로 보온도시락이란 걸 어깨에 메고 왔기 때문이었다. 보온도시락 속의 밥에선 김이 솟았고 게다가 따스한 국까지 담겨 있었다. 나는 장작난로 위에 쌓인 도시락들 옆에서 절망했고 그렇게 한 학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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