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작가들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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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작가들의 도서관

    • 입력 2020.12.06 00:00
    • 수정 2020.12.08 10:28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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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독자들보다 작가들을 더 열광하게 만들어 ‘작가의 작가’로 불리었다. 어린 시절 생일선물로 받은 백과사전을 독파한 것이 훗날 작가가 되는 데 결정적 이유가 된 그는 중국의 ‘요재지이(聊齋志異)’가 포함된 세계 각국 29권의 소설들로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시리즈를 엮으며 그는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은 모든 책이 존재하는 바벨의 도서관에 이미 소장돼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아직 생각하지 않은 미래에 쓸 소설들 역시 여기에 소장돼 있을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보르헤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작가들의 창작 행위가 실은 신에게 닿고자 쌓아올린 성서 속 바벨탑과 같은 ‘거대한 도서관’이 소장한 책들을 베끼는 행위라는 은유는 글쓰기의 근원을 묘파하며 작가들에게 묘한 자극제로 기능한다.

    ​흰 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발을 잃은 후 복수의 화신이 돼 버린 노 선장 에이허브의 치열한 삶을 그린 ‘백경(白鯨)’을 중학생 때 읽고 선원이 되기 위해 공업고교로 진학하지만 낙제를 하는 바람에 고래잡이배를 타는 대신 소설가가 된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의 권위 있는 신인작가의 등용문인 아쿠다가와상을 최연소로 수상한 이후 제대로 소설을 쓰기 위해 북부의 산 속으로 들어가 구도자와 같은 엄격한 생활을 하며 소설쓰기에 매진했다. 그는 “소설가란 모름지기 백과사전과 같은 지식을 지녀야 한다”고 설파할 정도로 작가에게 있어서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언설이 실린 ‘소설가의 각오’라는 책의 제목은 뭇 소설가들을 압박하는 데 매우 유효하게 작용한다. 

    작가에게 경험만큼이나 창작행위에 주요한 동력을 부여하는 공부는 대부분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작가가 아닌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은데 책읽기에 대한 세상의 수많은 어록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독서가 가져다주는 힘과 가치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의 예술가이자 사회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의 어록 하나는 책이 가진 또 다른 유용성을 이야기한다.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구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A book worth reading is worth buying).” 책을 사는 행위는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것이 곧바로 생활과 직결되는 전업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는 응원이다. 그에게 책을 구입해 읽는 독자는 사랑스럽고도 매력적인 후원자다. 하지만 책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여는 행위는 독서 인구의 급속한 감소와 비례하며 점점 희귀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작가도 창작자 이전에 한 사람의 독자란 점에서 주머니를 털어 책을 사는 행위의 주체자인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은 독서의 편력과 노고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가 어떤 작품을 써냈는지 써낼 것인지를 드러낸다. 가령, 필자의 서가 한 켠에 꽂힌 수백 권에 이르는 미술서적들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을 쓸 때 구입한 것들이고 다른 한 켠에 꽂힌 여러 권의 영문서적들은 번역일을 하며 옮긴 텍스트이거나 번역에 참고한 서적들이다. 가장 특이한 책이라면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미국의 마술사 할란 타벨이 쓴 마술시리즈 여덟 권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탈출마술사가 된 인물에 대한 소설을 쓸 때 요긴하게 사용된 책들이다.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참고하는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지만 직접 구입하는 게 대부분이다. 빌린 책들은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작업기간이 길어지면 대출을 연장하거나 운이 나쁘면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빌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구입할 때 드는 비용도 적잖은 부담인데 위에 언급한 ‘할란 타벨 마술시리즈’의 경우 권당 5만원, 시리즈 전체를 마련하는 데 40만원이 들었다. 그 책들을 참고해 쓴 단편소설의 원고료 절반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최근 김유정문학촌에 ‘문인들을 위한 도서관’이 생겼다. 춘천에 거주하는 시인·소설가들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이 도서관은 문인들로부터 구입할 도서를 직접 추천받는 게 특색이다. 무엇보다 한 번에 대출가능한 권수와 대출기간을 일반 도서관의 두세 배가 될 정도로 넉넉히 보장해주는 것도 더할 수 없는 매력이다. 벌써 꽤 많은 문인들이 애용을 하고 있다는데 필자도 그동안 값이 비싸 구입을 주저했던 ‘퇴계집’ ‘조선유학사’ ‘송명성리학’ 등 유학(儒學) 관련서적들 10여권을 빌려와 읽고 있다. 마침 쓰고 있는 장편소설에 요긴한 참고서적이기도 한데 탈고하고 나면 후기에 “문학촌 덕분”이라는 말이 절로 써질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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