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소설가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눈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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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눈 내리는 날

    • 입력 2020.11.29 00:00
    • 수정 2020.12.08 10:29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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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대관령은 남쪽 땅에서 겨울이 가장 일찍 찾아온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지만 어린 시절 대관령의 추위와 눈, 바람은 정말 대단했다. 아침에 벅(정지)에서 세수를 하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려다 차가운 문고리에 젖은 손이 쩍 달라붙었을 정도였다. 사나흘 줄곧 퍼부은 눈은 처마까지 닿았기에 그 눈을 치우느라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길을 내느라 눈을 치면 그 눈은 어른들 키보다 더 높이 쌓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바람은 또 어떠한가. 힘들게 신작로로 나가는 눈길을 쳤는데 하룻밤 불어온 바람에 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다. 그 눈이 딱딱하게 굳으면 눈치는 걸 포기하고 아예 그 위를 걸어 다녔다. 

    하지만 춥고 눈이 많이 내릴뿐더러 바람마저 사나운 대관령의 겨울을 어린 우리들은 무척 좋아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깎아준 나무스키를 비알밭이나 산골짜기에서 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과 얼음은 대관령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추우면 눈밭이나 얼음 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놀았다. 운동화와 양말, 바지자락을 태우고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야단맞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겨울도 여러 가지 겨울이 있었다. 좋은 겨울은 눈이 풍성한 겨울이고 가장 혹독한 겨울은 눈도 별로 없이 찬바람만 설치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런 겨울이 오래 지속되면 산골집의 우물이 말라갔다. 우물이 마르면 집 옆의 도랑에 덮인 얼음을 깨고 그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도랑물마저 마르면 어쩔 수 없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까지 나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도끼로 개울의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저녁마다 양동이를 들고 가서 개울물을 퍼서 날랐는데 그 일은 귀찮고 힘들었다. 실수로 양동이를 쏟으면 신발과 바지가 금세 얼어붙었다. 바람 씽씽 부는 저녁에 양동이를 들고 개울을 몇 차례 갔다 와야만 밥상 주변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방은 춥지 않았다. 아버지가 산에 가서 부지런히 나무를 했기 때문이었다. 산골의 겨울은 일 년 동안 땔 나무를 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눈이 없을 때는 지게를 지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했고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며 발구를 끌고 가 더 많은 나무를 했다. 리어카와 경운기는 한참 뒤에나 산골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산림법은 대단히 엄했는데 그 덕분에 산림감수의 위세가 대단했다. 국유림이나 사유림에 들어가 도벌을 하다 잡혀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마을의 어른들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산림감수가 퇴근을 한 뒤에야 나무를 실은 발구를 끌고 산에서 내려왔다. 엄마는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을 신기하게 알고 방에 엎드려 라디오를 듣는 우리들을 어둑어둑한 산 밑으로 보냈다. 평지에선 나무를 가득 실은 발구를 뒤에서 밀어야만 했기에. 참나무 가지를 묶은 나뭇단 속에는 가끔 아름드리 소나무 줄기가 숨어 있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산림감수에게 잡혀갈까봐 온힘을 다해 발구를 밀었다. 

    아버지는 나뭇단을 통째로 울타리에다 쌓았는데 그러면 나무도 잘 마르고 바람도 막아주므로 집은 한결 아늑해졌다. 엄마는 그 나무를 조금씩 벅으로 가져와 손도끼로 잘라서 버강지에 넣고 불을 피웠다. 부뚜막에 걸어놓은 솥으로 밥을 하고 가마솥에다간 여물을 끓였다. 버강지에 알불이 나면 부삽으로 꺼내 화리(화로)에 담아 삼발이를 올려놓고 국과 찌개를 만들었다. 간혹 샛바람이 부는 날은 내구운(매운) 연기가 굴뚝으로 가지 않고 한꺼번에 버강지로 나와 눈물을 흘리는 저녁도 있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늦게 돌아온 날은 날을 밥상을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벅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도 했다. 벽에 걸린 남포등은 식구들의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고 벅문(부엌문) 밖에선 눈발이 펄펄 날렸다. 

    대관령의 겨울밤은 길고 깊다. 그런 밤이면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리 집으로 놀러왔다. 그녀들은 밤새도록 달보기(화투 게임의 하나)를 쳤다. 달보기만 치는 게 아니라 지난 일 년 동안 산골마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품평회를 했다. 아버지도 그 틈에 끼어 술을 마시며 화투를 쳤다. 달보기는 강냉이알과 성냥개비를 돈 대신 썼는데 모두 다 친 다음에 돈으로 바꿨다. 그래봤자 십 원짜리가 오고가는 화투였다. 그녀들은 화투를 쳐 돈을 따려는 게 아니라 길고 깊은 겨울밤을 건너갈 목적으로 화투짝을 군용모포에 내려치는 것이었다. 나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화투짝이 그렸다가 지우길 반복하는 그림들을 신기하게 구경하며, 때론 하품도 하며 긴긴 겨울밤을 건너갔는데 그러다보면 아버지는 엄마에게 주문을 했다.

    “입입 굽굽한데(출출한데) 뭐 먹을 것 좀 만들지 그래.”
    “계속 술 마시는 사람 입이 뭐가 굽굽해요.”
    “술 마시는 입하고 다른 입이야.”

    자정 넘은 시간 엄마는 벅으로 나가 음식을 뚝딱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뚜덕국이었다. 뚜덕국은 수제비다. 달보기를 치던 그녀들은 군용담요를 밀쳐놓고 김이 솟는 뚜덕국을 후후 불며 먹었다.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하루는 이 집, 또 하루는 저 집, 이런 순으로 돌아가며 달보기를 치고 얘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겨울밤을 건너갔다. 그러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어느 새벽까지 견딘 나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들이 다음날 저녁 놀러갈 집을 정한다는 것을.

    대관령의 눈은 새벽에 처음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새벽에 온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일 것이다. 전날 저녁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폭설을 만나면 경이롭기까지 했다. 눈이 귀한 초겨울엔 더더욱 그랬다. 그런 날이면 아침밥도 먹기 전 옷을 두툼하게 입고 아버지의 장화를 신은 뒤 마당으로 나갔다. 넉가래나 삽, 싸리비를 들고 마을로 나가는 길을 쳤다. 눈이 내리면 나는 늘 마을로 나가는 길을 먼저 쳤다. 엄마는 헛간이나 장독대 가는 길을 우선이고 아버지는 외양간의 소와 관련된 곳을 먼저 선택했다. 그러다가 방으로 들어와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다시 본격적으로 눈을 칠 준비를 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산골마을이 한층 더 조용해졌다. 새들도 눈이 내리는 날은 어딘가에서 침묵을 고수했다. 산토끼, 맷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소가 울고 개가 짖을 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사람들도 웬만한 일이 아니면 돌아다니지 않고 따스한 구들장에 누워 낮잠이나 청했다. 눈을 쳐도 기껏해야 울타리 안이 전부였다. 꼭 필요한 곳으로 가는 길만 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등과 엉덩이를 지졌다. 그것은 눈에 익숙한 대관령 산골사람들의 눈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괜히 나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옷만 적셔서 들어온다는 핀잔을 듣는 게 싫다면 그냥 낮잠이나 자는 게 낫다. 눈이 내리는 날은 가난한 산골사람들이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모든 게 눈에 덮여 있어 먹을 것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폭설이 그치면 그제야 산골사람들은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대문 밖으로 나가 마을을 덮은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달부 어엽게 내렸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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