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모를’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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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모를’ 권리

    • 입력 2020.11.22 00:00
    • 수정 2020.12.08 10:31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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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중국 속담에 “귀신을 부르기는 쉽지만 보내기는 어렵다(請神容易送神難)”는 말이 있다. 나쁜 사람, 나쁜 일을 불러오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걸 떠나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의 이 말은, 포털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공급받는 이즈음의 언론시스템에 딱 맞아떨어진다. 클릭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 가십거리도 되지 않을 내용에 낚시성 제목을 단 기사, 출처가 분명치 않은 가짜뉴스, 밝혀놓은 출처 자체가 이미 가짜뉴스인 엉터리 기사……들은 버젓이 ‘언론’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이들이 두꺼운 낯을 들고 되뇌는 건 “독자의 알권리를 위해”라는 것이다. ‘알권리’란 독자들이 알지 못했을 때 받아야 할 불이익을 위한 것이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듣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좀 부풀려 말하자면 매일 포털사이트를 장식하는 검색어들 가운데 상위에 랭크되는 99%가 모른다 해도 살아가는 데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는 정보들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살아가는 데 훨씬 ‘이익’이 되는 것들이다. 이 논리에 좀 더 과장을 보탠다면, 검색어 상위에 랭크된 기사를 쓴 기자는 99%가 ‘기레기’다.

    독자들이 진짜 알고 싶은, 알아야 할 기사보다는 몰라도 지장 없는, 나아가 모르는 게 더 나은 기사에 혈안이 되는 것은, 실은, 기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 독자들에 있다. 이 ‘독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장편소설 〈연금술사〉의 저자이며 세계적 명성을 가진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설명하려고 시간 낭비하지 말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뿐이다(Don't waste your time with explanations: people only hear what they want to hear).”는 말에 기댄다면, 99%의 쓸데없는 기사는 99%의 기레기와 99%의 허접한 독자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을 하게 되는 것이고, 공급한 것은 또 모조리 소비해 주시는, ‘수요공급의 법칙’을 눈물 나도록 성실하게 지키는 현대인의 가련하고 끔찍한 업보다.

    최근 화제가 된 제프 올롭스키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우리가 매일 어떤 방식으로 ‘21세기의 신종마약’을 폭풍흡입하고 있는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들이 기왕의 ‘언론’을 대체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난삽한 언론지형도는 노출증과 관음증을 타고 넘어 사실이 아닌 정보들을 사실로 만들고, 사실이 아닌 정보들이 재생산을 거듭하면서 구축한 거대한 도약대에 올라 ‘진실’의 산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고공점프의 신공을 보여준다. 이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한때 세계적 SNS 산업을 이끌었던 전직 CEO나 고위간부들이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고객은 영어로 흔히 customer라고 한다. ‘커스터머’는 우리도 적잖게 쓰는 용어다. 그런데 고객을 user라고 부르는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마약 산업이다. 마약업자들은 마약을 구입하는 고객을 ‘커스터머’가 아니라 ‘유저’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저’는 오늘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용어다. 우리가 접속하는 모든 인터넷 사이트, 어플리케이션에서 우리는 ‘유저’다. 디지털매체를 ‘신종마약’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클릭수, 조회수, ‘좋아요’ 숫자의 늪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마약에 중독되는 것 이상의 중독증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SNS를 끊었을 때 일어나는 금단증세가 담배나 술을 끊었을 때 일어나는 그것과 견줄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나쁜 뉴스는 좋은 뉴스가 번지는 속도보다 열 배가 빠르다는 통계는, 실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각종 모니터에 노출된 정보의 양 자체가 비교불능이다. ‘나쁜’은 ‘좋은’을 능가하고, 압도하고, 잠식한다. 자신이 찾는 정보를 좇다가 낚시성 제목의 기사, 야릇한 사진과 그림, 번쩍이는 광고에 마우스를 얹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류가 몰락과 사멸의 길로 접어든 것은 돌아설 수 있는 지점을 심하게 지나쳐버린 ‘기후’에 있지만은 않다. ‘기후’가 인류의 물리적 멸종을 암시한다면, ‘모를’ 권리를 상실해버린 채 ‘신종마약’에 취해버린 인류는,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적 멸종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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