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라디오와 테레비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라디오와 테레비

    • 입력 2020.08.21 00:01
    • 기자명 칼럼니스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라디오의 시절이 있었다. 집안에서 라디오는 아버지가 애용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우리 집은 국도가 있는 건넛마을과 달리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건전지로 라디오를 작동시켰다. 둥그런 건전지 네 개가 들어갔는데 너무 빨리 닳아 나중에는 손전등에 들어가는 사각형의 뭉툭한 것으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고무줄로 둘둘 감아 라디오 뒤편에 묶어놓았는데 베게만한 라디오가 마치 해다(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밥을 먹을 때나 잠이 오지 않을 때 아버지는 늘 라디오를 끌어당겨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주파수를 맞췄다. 라디오 소리는 산골짜기 외딴 집을 방문하는 귀한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점심을 먹을 때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를 들었고 등잔불을 켜놓고 가족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는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이 흘러나왔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밤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심심함을 달래려고 다시 라디오를 틀었다. 사회교육방송이 흘러나오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윗방의 이불 속에서 멀고 먼 흑룡강성으로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성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닫이문의 문살에 바른 창호지에는 눈송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아버지는 채널을 자주 돌렸다. 그럴 때마다 치직, 쇄, 하는 소리가 피어났다. 가끔 북한방송이 잡힐 때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급히 채널을 돌렸다. 새벽이면 먼 바다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이미 나는 대관령 산골짜기에서 추자도, 대화퇴, 대청도 등등의 어장에서 바람이 얼마나 불고 파도가 높은지 잔잔한지 알 수 있었다. 그곳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눈 내리는 깊은 밤 잠결에 듣는 라디오 소리는 멀고 아련했다. 왠지 솜이불을 덮은 채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집에는 신문물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딱 두 개 있었는데 그게 바로 라디오와 괘종시계였다. 부모님이 윗집에 돈을 췌(빌려)줬는데 그 집이 돈을 갚지 못하고 이사를 가게 되자 돈 대신 가져온 것들이었다. 시계는 두 개의 태엽을 감아야만 바늘이 돌아갔는데 그걸 ‘시계 밥 준다’라고 했다. 벽에 걸어놓은 괘종시계는 조금이라도 기울면 추(시계불알)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계 아래에 연필로 중심이 되는 지점을 표시해놓고 밥을 모두 준 다음에 꼭 균형을 바로잡곤 했다. 넓지 않은 방인지라 시계가 종을 치는 소리는 의외로 커서 처음엔 깜짝깜짝 놀란 적도 많았다. 그 라디오와 시계는 언제 집에서 사라졌을까. 덕분에 나는 매년 학기 초에 작성하는 가정조사 문항에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없는 설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라디오로 들었던 최고의 프로는 아마 주말마다 방송되었던 ‘태권 소년 마루치 아라치’였던 듯싶다.

    라디오의 인기를 일격에 무너뜨린 것은 테레비(텔레비전)였다. 마을에는 이미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집이 두세 집 되었는데 그 집의 인기는 엄청났다. 처음에는 자랑도 할 겸 저녁이나 주말에 아이들이 방문하면 윗방을 내어주곤 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급변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밤이 깊었는데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텔레비전을 가진 집주인들은 하나둘 문을 닫아걸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 텔레비전 보러 왔다고 얘기하면 전등을 끄고 텔레비전 소리를 낮춘 채 자는 척했다. 하지만 문창호지에서 어른거리는 푸른빛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몇 번 더 비굴한 목소리로 불러보다가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으니 당시 내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어떤 집은 사람을 가려서 받았다. 누군 들어오라 하고 누군 돌아가라고 했으니…… 우리도 텔레비전을 사자고 조를 수도 없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있어도 무용지물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안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형이 사가지고 온 작은 크기의 중고 텔레비전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데 어떻게 보냐고 물으니 형은 다 방법이 있다고 했다. 형이 선택한 방법은 충전해서 쓰는 자동차 배터리였다. 세상에! 이런 방법이 있다니. 나는 신이 나서 긴 장대 끝에 매달은 안테나를 들고 더 좋은 전파를 잡을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안테나선을 잡은 누나는 중간에 선 채 집에서 화면조정을 하며 지시를 내리는 형의 얘기를 내게 전했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돌리래!”
    “됐어?” 
    “조금 더!”

    비록 화면이 작은 텔레비전이었지만 그 기쁨은 작지 않았다. 이젠 치욕스럽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기웃거리며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사실 그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떤 날은 문밖에 쪼그려 앉아 방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만 들으며 내용을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또 밤 아홉 시만 되면 쫓아내는 집도 있었다. 밖에서 소리치면 전등과 텔레비전을 끄고 아예 잠을 자버리는 집도 있었으니.

    비록 자동차 배터리로 보는 텔레비전이었지만 어쨌든 더 이상 시청 구걸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더군다나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었는데 배터리로 보는 텔레비전은 정전이 돼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때는 툭하면 정전이 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밤 마당에 나가 오줌을 누다가 건넛마을이 캄캄해진 걸 알았고 곧바로 나는 알아차렸다. 건넛마을에선 지금 텔레비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정전이다! 우리 집만 테레빌 볼 수 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어느 주말 오후 다시 정전이 되자 마을의 아이들이 하나둘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게 보였다. 나는 회심의 표정을 지은 채 대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한 시간쯤 뒤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속극인 ‘전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그걸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을 때 당한 수모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누가 나를 문전박대했고 누가 내게 따스한 손을 내밀었는지를. 어차피 방이 좁아 다 들어갈 수 없었기에 아이들의 반은 방에서, 나머지(나를 박대한 집의 아이들)는 처마 밑 뜨럭(흙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봐야했다.

    배터리로 보는 텔레비전은 정전과는 무관하지만 가장 불편한 점은 바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자동차 공업사에 가서 배터리를 다시 충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전을 하려면 이십 리 거리에 있는 시내로 무거운 배터리를 가지고 나가야 했다. 버스나 자전거를 이용해야 하는데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장을 보러 가는 날을 기다리지 못한 나는 자전거 짐칸에 배터리를 싣고 가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전거 앞바퀴와 함께 뒤로 벌렁 솟아오른 적도 있었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우리 집만의 비밀이었다. 배터리가 거의 다 닳기 시작하면 텔레비전 화면이 아래 위에서부터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은 화면가운데에 흰 선 하나만 남게 된다. 화면은 사라졌지만 다행히 목소리는 나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화면은 없고 라디오처럼 목소리만 나오는 연속극을 들은 적이 많았다. 집에 전기가 들어온 게 중학교 2학년(1980년)이니 그때까지 등잔불을 켜고 배터리를 충전해 텔레비전을 봤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라디오와 괘종시계가 내게 시(詩)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면 텔레비전은 소설과 닮아 있었다. 십여 년 전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다가 추자도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다. 추자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어업전진기지 추자도. 아, 어린 시절 아버지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바로 그 섬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제주도 행을 포기하고 며칠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대관령은 산골인지라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안테나가 달려 있는 장대를 들고 더 양질의 전파를 포착하기 위해 집 옆 동산에 올랐다. 그 시절 텔레비전은 내게 가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