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시간이 없다
  •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하창수의 딴생각] 시간이 없다

    • 입력 2020.08.16 00:01
    • 기자명 칼럼니스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빛은 진공상태에서 1분 동안 1,800만 킬로미터를 갈 수 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1억5천만 킬로미터이니, 태양을 떠난 햇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는 대략 8분 20초가 걸린다. 만약 태양이 생명을 다해 마지막 햇빛을 내뿜었다면, 최소한 8분20초 동안은 햇빛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 같은 ‘독성’을 지닌 햇빛이 발사되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8분20초 동안 우리는 ‘멀쩡’할 수 있다. 

    8분20초 -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날랜 사람은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내달린다면 14킬로미터 정도를 달릴 수 있고, 우사인 볼트가 자신의 100미터 최고기록으로 8분20초를 계속 내달린다면 출발한 곳으로부터 대략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프랑스 작곡가 다류스 미요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짧은 7분27초짜리 오페라 〈풀려난 테세우스〉는 넉넉히 들을 수 있고, 핀란드의 국민음악가 시벨리우스의 저 유명한 교향시 〈핀란디아〉는 연주시간이 딱 8분20초이니 피날레를 장식하는 순간과 극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가 되든, 초침이 500칸을 움직여가는 8분20초라는 시간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짧다. 더구나 태양으로부터 독성 가득한 ‘태양광선’이 날아오고 있다면 8분20초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체념, 포기, 절망, 낙담뿐이다. 물론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기도를 올릴 테지만. 그런데 절망을 하든 기도를 올리든, 8분20초 전에 ‘재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면 이마저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 더 이상 뭘 할 수 있는 게 없구나,”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재앙이 닥치는 순간에야 비로소 “끝났구나!”라고 절망하게 될 것이고, 그때 올리는 기도라고 해봐야 외마디에 불과하다. 어쩌면 재앙이 닥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야말로 “훅”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8분20초는 ‘눈 깜빡 할 사이’와 다를 게 없다.

    사실, 태양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8분은커녕 8시간도, 8일도, 8개월도, 8년조차도, 넉넉한 시간일 수 없다. 80년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엑스 같은 대형 우주선을 1억 대쯤 만들어 거기에 지구인들을 태워 우주공간으로 날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행성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라면, 80년이라고 해봐야 결국 지구인을 ‘우주 미아’로 만드는 데 ‘낭비된’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이쯤 되면 한 인간의 전 생애에 해당하는 80년조차 결코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태양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있다. 태양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광선’은 한낱 가능성의 문제이지만,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산불과 가뭄과 물난리는,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북극의 영구동토와 남극의 빙하는, 당장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것이 수십 년 전에 이미 기후학자들이 입을 모아 “평균기온 0.5℃가 올라가면 생기는 현상”이라고 경고했던 일들이란 사실이다. 8분20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전에 ‘인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하거나 “그까지 것”이라고 코웃음쳤던 일이 터진 것이다. 이 사실은,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회복할 시간이 지났다는 것,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파리협약’을 깬 트럼프만 욕한다고 해결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지금·당장 자동차를 버리고, 공장의 가동을 중단시키고, 플라스틱 사용을 끊고, 갈아엎은 거대한 초원에다 소에게 먹일 옥수수밭을 일구는 따위의 미련한 짓을 하지 않는다 해도, 가뭄과 홍수와 산불 같은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지구라는 거대한 감옥행성에 갇힌 채 죽어가야 할 종신형 죄수로부터 벗어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에라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절실하게 물을 수 있다면, 그나마 그것이 절망과 기도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