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내일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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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내일을 위한 시간

    • 입력 2020.08.10 08:23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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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현재 영화 ‘소년 아메드’가 개봉중이다. 시간을 내기 어려워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2019년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기도하지만, 수상여부를 떠나 다르덴 형제 감독(장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벨기에)의 작품이라 꼭 보려고 한다. 그만큼 이들 형제의 작품은 필자에겐 일종의 보중수표와 같다.

    이들 듀오의 작품은 특별히 칸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9년 ‘로제타’와 2005년 ‘더 차일드’로 두 번에 걸쳐 칸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의 영예를 차지했다. 2008년 ‘로나의 침묵’으로 각본상, 2011년 ‘자전거를 탄 소년’으로 심사위원대상에 이어 ‘소년 아메드’로 감독상을 받았다. 칸이 특별히 사랑하는 감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이름에 상응하게 다르덴의 작품세계는 현실을 예리하게 재단하는 날카로운 힘이 있다. 

    이들 감독의 특징이라면 영화를 연출하기 전까지는 다큐멘터리제작자였다는 사실이다. 1951, 54년생인 이들 형제는 한창나이였던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 다수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든다. 그러다 다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후 영화연출로 전향한다.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그 감정의 오묘함과 심리의 복잡함을 카메라와 현장의 사운드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오늘지면을 통해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은 여러 편이지만, 칸영화제 수상작이 아닌 작품을 골라보았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2014년 작인 이 작품은 신자유주의로 파편화되어가는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열악한 노동현장을 고발한다거나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목소리 높이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의 시작은 잠에서 깨는 여인의 모습으로 다짜고짜 시작한다. 깊은 아침잠에서 깨는 것도 아니고 잠시 눈을 붙인 모습으로 여자는 부스스 일어난다. 남편은 다급히 핸드폰을 들고 들어와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며 통화할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한다. 재차 재촉하는 남편의 권유에 못 이겨 전화기를 받아든 여인은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이들 부부의 대화를 통해 천천히 밝혀지는 현실은 암담하다. 우울증치료로 회사에 휴직을 냈던 주인공 산드라는 복직을 원한다. 하지만 17명이 일하던 태양열집열판제작업체의 사장은 산드라 몫의 일을 다른 16명에게 분배했는데도 공정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산드라의 복직에 회의적이다. 결국 공을 직원들에게 돌리는 비열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직원들에게 성과급(보너스)으로 천유로(한화로 약 백삼십 만원)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를 포기하고 산드라의 복직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투표로 선택하게 한다.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장장의 압박과 회유로 두 명만 빼고 모두 보너스를 선택한다. 하지만 산드라를 옹호하는 직원이 공장장의 행태가 부당하다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사장에게 재투표를 요구한다. 강력한 항의에 마지못해 사장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재투표할 것을 받아들인다. 단, 과반 이상이 산드라의 복직을 원해야하고 이후 모두 보너스를 포기해야한다는 조건을 단다.

    이제 산드라에게 남은 시간은 금요일 저녁, 토요일, 일요일, 단 이틀 그리고 한 번의 밤(영화의 프랑스어 원제이기도 하다. deux jours, une nuit, 영어제목은 two days, one night)이 주어져 있다. 산드라는 짧은 주말시간동안 16명의 직장동료들을 만나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 줄 것을 부탁하러 다녀야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다. 남편과 동료 줄리아의 독려로 겨우 몸을 움직여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그녀의 고군부투를 카메라와 함께 쫓아가는 여정은 괴롭다. 우선 산드라 자신이 이미 의지가 약하다. 우울증 약에 의지하고 동료들에게 부탁하는 자신을 거지와 같다고 스스로를 비하한다. 용기를 내어 찾아간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보너스를 포기 못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은 그래도 인간적이다. ‘절친’이라고 생각했던 동료는 아예 마주할 생각도 없다. 그 점이 산드라를 더욱 절망케 한다. 

    영화는 그렇게 공동체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거나 혹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이들을 통해 그래도 인간적인 관계가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하지만 단순하진 않다. 산드라의 복직을 두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인, 아버지와 아들 간에 주먹질이 발생하기도 하고, 부부 간에 의견충돌로 이혼을 결심하게도 한다. 동료 가족들의 불화의 씨앗이 된 산드라는 이제 흔한 말로 민폐 자체가 되어 버린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산드라는 항우울증 약을 다량으로 복용해 현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자신의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산드라를 응원하러 온 동료에 의해 다행히 그녀는 약을 토해내고 병원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는다.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는 없다.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위해 가족이라는 또 다른 연대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도하는 관객 역시 혼란스럽다. 

    산드라가 포기하면 모두가 흔들리지 않은 삶을 살아갈 터인데, 산드라의 복직투쟁으로 여러 가정에 불화의 씨앗이 자라고 더 나아가 해체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앳된 얼굴의 흑인동료는 계약직직원이다. 산드라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는데 이유는 보너스가 아니다. 어차피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여금은 백오십유로(한화로 약 이십 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산드라의 복직에 표를 던지면 그는 회사에 밉보여 재계약이 되지 않을지 모르는 암묵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영화는 매우 단순한 플롯에 우리 삶의 단면과 군상으로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 간결한 구조 속에 문제의 본질을 관통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연출의 힘이다. 모든 문제의 출발은 심플할지라도 양태는 다양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풀다보면 자르지 않고 매듭을 풀기 어려운 지점에 봉착한다. 잘라야하지만 그러나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그 해답을 제시한다.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를 두고 벌어진 투표의 결과는 8:8 절묘한 숫자이다. 연대를 의미하는 기호는 고리이다. 앞의 8은 연대의 고리(∞)로서 체인이다. 뒤의 8은 돈을 의미한다. 물질과 인간을 두고 벌이는 저울대는 정확히 가운데서 멈추었다. 이미 물질적 가치가 인간성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대칭점은 산드라와 그 동료들이 애써 성취한 소중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균형의 경계에 선 산드라는 자신의 복직을 포기한다. 사장이, 직원들의 사기와 산드라를 위해 제시한 방법이란 것이 앞서 소개한 계약직 직원의 재계약을 파기하고 그 자리에 그녀를 복직시키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시험은 없다. 산드라는 노(No)라고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자기연민으로 고통 받던 그녀는 이제 우울하지 않다. 남편에게 웃는 낯으로 전화를 걸고 말한다. “우리 잘 싸웠죠!” 그녀의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다. 영화가 리얼리티로서 현실을 꼬집고 있는 부분은 연대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에필로그, 모든 짐을 벗어던진 산드라의 가벼운 뒷모습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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