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간나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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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간나와 새끼

    • 입력 2020.07.29 00:0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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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내가 고향을 떠나 춘천으로 유학을 떠났던 해는 1982년이다. 

    춘천은 도청소재지였지만 위치상 강원도의 서북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갈 수 있었던 도시는 아니었다. 하긴 평창에서 이제 중학교를 졸업한 나이다 보니 여행을 가본 적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동안 강원도 밖으로 나가본 곳은 친척들과 함께 갔던 제천 큰댁이 전부였고 강원도 안에선 삼척, 삼척을 가기 위해 지나쳤던 강릉, 홍천 서석, 횡성 안흥이 다였다.

    아, 중학교 수학여행이 있다. 수학여행은 보통 이 학년 때 가는 것인데 1980년의 혼란스러운 시국으로 취소가 되었다가 삼학년 봄에 주마간산 식으로 춘천, 설악산, 강릉을 1박2일로 다녀왔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춘천에선 소양댐, 설악산에서는 신흥사와 비선대까지, 그리고 강릉의 경포대 솔숲에 있었던 여인숙에서 잠을 잤던 게 생각난다. 다음날 삼척의 죽서루에 들렀다가 돌아왔던가. 아니…… 이 일정을 1박2일에 소화할 수 있었을까. 2박3일이 아니었을까.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녀석의 기억력도 시원치가 않다. 하긴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니 이상하지도 않다.

    짧은 여행이든 긴 유학이든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호기심과 불안, 기대가 적절하게 섞인 파도일 것이다. 나의 춘천행도 그러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삼 년 동안 잘 견딜 수 있을까. 산골짜기에서 왔다고 춘천 녀석들이 내 말과 행동을 무시하고 텃세를 부리지는 않을까. 가장 중요한 공부는 어찌될까. 가까운 강릉으로 갈 걸 괜히 허세를 부려 먼 춘천까지 가는 건 아닐까.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온갖 생각에 시달렸다. 당시 춘천 가는 길은 편도 1차선인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새말까지 가고 거기서부턴 국도를 따라 횡성, 홍천을 지나가는 경로였다. 횡성, 홍천, 춘천 구간엔 대관령만큼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고갯길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하고 먼, 멀미 기운이 가시지 않는 길이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춘천사람들의 말은 나긋나긋했다. 부드러웠다. 나는 춘천에 유학을 가서야 비로소 내가 쓰는 말이나 억양이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특히 내 또래 남자들의 말투에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어디 가니?”

    여자도 아닌데 ‘어디 가나?’가 아니라 ‘어디 가니?’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온몸이 가려웠다. 말과 사람이 모두 징그러웠다. 거칠고 억센 억양의 내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어서 뭐라 대답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말을 생각해 보니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왠지 부럽기도 해서 춘천의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걸으며 몰래 따라해 보기도 했다. 마침내 그 말이 어느 정도 입에 붙자 나는 주말에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차분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물었다.

    “야, 어디 가니?”
    “……이 새끼 춘천 가더니 두 달도 안 돼서 간나가 돼서 돌아왔네!”
    “야, 도시에선 남자들도 다 이렇게 말해. 니들도 한번 써봐.”
    “새끼, 너나 실컷 써먹어라! 사내새끼가 가니가 뭐냐, 가니가.”

    고향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는 사투리와 표준어를 조금이나마 구별해가는 시기였다면 낯선 춘천에서의 생활은 내가 쓰는 사투리가 종종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눈치 채는 시기였다. 그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할 때 나는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입에 붙어 있는 사투리나 억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숨는 일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고향에서 배운 말과 어투를 어떻게든 고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말을 천천히 하고, 억양을 가능한 한 낮추고, 표준어를 생각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다른 지역도 그렇겠지만 강원도의 말 역시 생활환경, 정치, 역사, 위치 등등의 요소에 의해 어떤 특징을 드러낸다. 산골지역과 바닷가, 도시의 말이 조금씩 다르다. 또 태백산맥 동쪽의 말과 서쪽의 말도 차이가 난다. 영서지역의 대표도시인 춘천과 원주는 수도권의 부드러운 억양을 따라간다면 속초는 북한 말이 많이 내려와 있고 삼척 강릉은 경상도 말이 올라와 있다. 산간지역인 내 고향 대관령의 말은, 특히 내 경우는 주로 영동권과 함경도의 말과 어투와 비슷해서 간혹 서울에 가면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할 수 없이 나는 전직이 시베리아의 북한벌목공이었다가 탈출해 남한으로 왔다고 대답한 적도 있었는데 그걸 진짜로 믿는 술집 주인도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데 예전에는 오죽했겠는가. 아마 달부 어여웠을 것이다.

    다시 춘천의 어느 날로 돌아가자. 아마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외지에서 춘천으로 유학 온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월말이 되면 우체국에 가서 고향집과 전화통화를 했다. 다음 달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말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중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월말이 되면 우체국 시외전화 신청 창구엔 학생들로 가득 찼다. 집 전화번호를 적어 신청하고 기다리면 직원이 이름을 호출하며 몇 번 전화기를 사용하라고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우체국 한쪽엔 그 용도의, 문이 없는 공중전화박스가 네다섯 개 있었다. 보통 그렇게 부모님과 통화하면 돈은 우편전신환으로 왔고 그걸 가지고 다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꾼 뒤에야 한 달 생활비로 사용했다.

    매달 먼 곳에 있는 집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다녀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기에 유학생들은 월말이 가까운 주말이면 우체국에 모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전 달보다 많은 생활비를 엄마에게 요구했다. 쓸 데가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엄마는 돈이 부족하다고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실랑이가 벌어졌고 화가 난 나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을 천천히 하고, 억양을 가능한 한 낮추고, 표준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던 그동안의 내 수고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의 목소리를 모두 구사한 뒤 나는 마침내 췌서라도(꾸어서라도) 요구한 돈을 보내주겠다는 엄마의 확답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아…… 그날 수화기를 놓고 돌아섰을 때의 우체국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흘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숨기려고 했던 대관령 사투리를 아주 적나라하게 구사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우체국에서 도망쳐 나왔는지 모르겠다. 다시 사람들이 없는 골목길로 달려가 숨을 수밖에 없었다. 

    흥분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고향의 말은 꽤 오래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그 창피함이 뻔뻔함으로 자리이동을 한 건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간나(처녀, 계집아이의 평북 함경 방언)’와 ‘새끼’라는 낱말도 고향에선 아주 친근했었는데 춘천에선 욕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어느 저녁 같은 과 친한 후배여학생에게 “야, 이 간나야, 술 마시다 어디 가나?” 하고 물었다가 된통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내 고향에선 친근감을 표시하는 낱말이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었다. 

    하여튼 춘천은 내가 하는 말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보여주었고 더불어 남자들의 말도 여자들처럼 나긋나긋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코준(알려준)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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