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영화 ‘기생충’과 인디언놀이 그리고 모스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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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영화 ‘기생충’과 인디언놀이 그리고 모스부호

    • 입력 2020.01.27 10:10
    • 수정 2020.01.28 08:4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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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영화 ‘기생충’을 주제로 한 학생들과의 세미나에서 나왔던 질의·응답 중 흥미로운 점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왜 뜬금없이 영화에서 ‘인디언 놀이’가 소재로 차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인집 박 사장의 막내아들, 다송이가 지하실에 갇힌 남자가 보내는 모스부호를 해독하고도 극의 전개상 별다른 사건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간 것에 대해 의문이 든다는 질문이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감독답게 나름의 장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의미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영화에 대해 배우는 학생으로서 나름 허술한 점이라고 판단하여 교수자인 필자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 질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양가적인 입장을 조율하여 질문에 응했다.

    예의 ‘날카로운 질문’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학생들과 같이, 이야기의 흐름과 장면들을 복기하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 나갔다. 먼저 결론적으로 세미나에 있었던 여러 개의 질문 중 두 개를 떼어내 소개한 이유는 그 질문들이 정교한 퍼즐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인디언에 대한 상징은 추출된 자에 대한 ‘메타포’로 봄이 좋을 듯싶다. 다시 말해 밀려난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극 중 다송이는 부엌에 음식을 구하러 나온 지하의 남자(전 가정부의 남편)를 보고 귀신으로 착각한다. 아이는 못 볼 것을 보고 말았고 그 사건 이후로 몇 년간 트라우마에 빠져있는 상태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영화 '기생충' 스틸컷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박사장 부부는 아이와 함께 캠핑을 떠나지만 호우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이의 성화 때문에 정원에서 캠핑을 시도한다.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의 모험은 아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판단에 부모는 거실에서 지켜보며 아이 혼자 텐트를 치고 캠핑하는 것을 허락한다.

    장대비가 내리는 와중, 정원의 인디언 텐트에서 캠핑을 하던 다송이는 지하실에 갇힌 남자의 모스신호를 인지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 영화에선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텐트 안에서 밤새 워키토키로 부모를 호출하던 아이는 그저 지쳐 잠이 들 뿐이다. 아침이 되고, 밤새 내리던 호우를 극복한 소년은 하룻밤 ‘나홀로 캠핑’이라는 모험에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다송이에 대한 치유는 일종의 ‘공감에 대한 망각’이라는 의례가 된다. 주류(主流)의 적자(嫡子)로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아이에게 지하에서 오는 비주류의 메시지는 더 이상 의미로 다가오지 못한다. 선택된 자의 위치에 공고하게 선 다송이에게 주어진 역할놀이는 더 이상 추출되거나 밀려난 자로서 인디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영화 '기생충' 스틸컷

    적자임을 확인받은 아이는 이제 축하 케이크를 들고 파티장에 입장하는 제시카를 구출하기 위해 인디언으로 분한 박 사장과 운전기사(송강호 분)을 응징하는 서부의 개척자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서 아이가 자신의 계급계층에 맞는 역할놀이를 한다는 상황설정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로써 박 사장이 성공한 벤처기업의 대표인 인물설정은 아들 다송이가 모험을 통해 적자임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전이된다. 개척자로서 승자의 위치를 물려받을 아이가 자신의 위치와 이반된 인디언 역할을 맡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버그다. 따라서 비주류사회에 대한 공감은 주류의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방해가 될 뿐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텐트 안에서 밤샘하며 인디언 역할을 할 때 수신했던 모스신호는 극 중에서 더 이상 사건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영화 기생충은 매우 세밀하고 정치(精緻)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계급계층의 구조적 문제를 희화하고 비틀어 댄다. 이러한 점이 불편한지, 일부에선 영화 기생충을 ‘좌빨 영화’라고 치부하는 리뷰도 있는 듯싶다.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사회문제를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해서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사회와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창작의 중요한 동력이다. 예술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추력으로 작동하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는 표현에 대한 성숙한 태도임이 분명하다. 같은 논리로, ‘표현에 대한 표현’으로서 다양한 ‘메타비평’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영화 기생충을 불편하게 보는 시각에 대한 질책은 이쯤에서 그만두려 한다. 영화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다양하게 쏟아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건강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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